사실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탄생한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국시대부터 지역감정이 생겼다, 사실 고려시대부터 지역감정이 생겼다라는 말은 모두 개소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실질적으로 지역감정이 생긴지는 한국 정치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서로 세력을 넓혀가던 도중 인위적으로 생겨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애초에 삼국시대에는 세개의 국가가 한개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하여간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감정에 관련되어서. 특히나 전라도, 경상도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상당히 수두룩한데, 이러한 잘못된 정보의 출처는 대부분 디시인사이드 내부에서도 암적인 존재 취급을 받고 있는 정치/사회 갤러리나 일베, 혹은 오유에서 퍼진 정보이며, 동시에 폐기된 학설 역시 인터넷상에서 진짜인냥 취급을 받고 있죠. 대략 이런것을 카오스 이론에서는 '카오스'라고 부릅니다. 어라?
이러한 잘못된 정보들이 상당히 퍼지면서 안그래도 심각한 지역감정은 불을 붙은듯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온라인상에서 상대를 '쓸데 없는 쓰레기'라면서 전라디언, 개쌍디언등의 모욕적인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데요, 이러한 지역감정의 폐해는 상당히 심각한 편입니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많은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우리나라만 있는게 아닙니다. 세계적으로도 지역감정은 상당히 심각한 나라가 많죠. 대표적인 나라로 이탈리아와 중국을 들 수 있죠. 앞으로의 포스팅에서도 다룰 예정이지만, 중국은 여러 소수민족들과 한족들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한 중국 해안가와 옛날과 다를 바 없는 중국 내륙, 그리고 지가 잘났다고 싸우는 화북지역과 강남지역, 그리고 허난(河南, 어째 예전에 썼던 블로그 이름과 비슷하다?)성과 나머지 성들의 갈등이 대표적입니다.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카오스인데, 로마 vs 나폴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남북 지역감정에서부터 각 도시끼리의 갈등 역시 상당히 심각해서 월드컵때도 "자 나폴리 선수 누구누구가..."할 정도라고 하니 알만하지요. 애시당초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멸망 이후 베네치아, 교황령, 나폴리등의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살아가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이탈리아인을 만드는것이 이탈리아의 시급한 문제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역감정이 상당히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스페인이나 독일, 미국의 경우에도 지역감정은 심각한 편입니다. 스페인의 경우에는 카스티야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 독일의 경우에는 구 동독 지방과 서독지방이 갈등을 빚고 있으며, 미국 역시 메갈로폴리스로 대표되는 동부와 실리콘밸리로 유명해진 서부가 서로 잘났다고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도 지역감정은 상당히 심각한 편입니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영국에서 주최하는 경기는 웨일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만 참전해도 국제 경기라고 부릅니다. 실상 하나로 영국인들이 모이는때에는 월드컵과 올림픽, 그리고 전쟁때만이라는 농담이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서로를 과거 휘그모어즈나 토리즈라고 부르면서 깠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네요. 따라서 우리나라만 지역감정이 심각한건 아닙니다.
본론으로 넘어가서, 지역감정의 태생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전라도인이 남방계가 많아서 따돌림을 당할수밖에 없다는 개드립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기원설, 조선시대 기원설, 삼국시대 기원설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위의 설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선사시대에 전라도인만 남방계가 많아서 따돌림당할수밖에 없다는 주장의 경우에는 함경도 역시 남방계 인구가 많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사람이 정착한지는 벌써 수천년이 넘게 지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어디에 정착한 사람이 다른곳으로 건너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전라도에 김해김씨가 많거나 경주김씨가 많다는것으로 증명됩니다.
삼국시대부터 기원했다는 점은 본문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그 시절에는 전라도 일부가 가야로 편입되었고, 당시의 경우에는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희미했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이 있긴 했지만 이 역시 민족 개념에서가 아닌 단순한 재부흥운동이라고 보는게 옳을것이고, 게다가 백제의 중심은 위례성을 근거로 한 한강유역과 공주등지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대인데, 이 충청도 일대와 경상도 일대의 경우에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것으로 보아서 실질적으로 이 설 역시 현실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감정에 관련되어서. 특히나 전라도, 경상도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상당히 수두룩한데, 이러한 잘못된 정보의 출처는 대부분 디시인사이드 내부에서도 암적인 존재 취급을 받고 있는 정치/사회 갤러리나 일베, 혹은 오유에서 퍼진 정보이며, 동시에 폐기된 학설 역시 인터넷상에서 진짜인냥 취급을 받고 있죠. 대략 이런것을 카오스 이론에서는 '카오스'라고 부릅니다. 어라?
이러한 잘못된 정보들이 상당히 퍼지면서 안그래도 심각한 지역감정은 불을 붙은듯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온라인상에서 상대를 '쓸데 없는 쓰레기'라면서 전라디언, 개쌍디언등의 모욕적인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데요, 이러한 지역감정의 폐해는 상당히 심각한 편입니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많은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우리나라만 있는게 아닙니다. 세계적으로도 지역감정은 상당히 심각한 나라가 많죠. 대표적인 나라로 이탈리아와 중국을 들 수 있죠. 앞으로의 포스팅에서도 다룰 예정이지만, 중국은 여러 소수민족들과 한족들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한 중국 해안가와 옛날과 다를 바 없는 중국 내륙, 그리고 지가 잘났다고 싸우는 화북지역과 강남지역, 그리고 허난(河南, 어째 예전에 썼던 블로그 이름과 비슷하다?)성과 나머지 성들의 갈등이 대표적입니다.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카오스인데, 로마 vs 나폴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남북 지역감정에서부터 각 도시끼리의 갈등 역시 상당히 심각해서 월드컵때도 "자 나폴리 선수 누구누구가..."할 정도라고 하니 알만하지요. 애시당초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멸망 이후 베네치아, 교황령, 나폴리등의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살아가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이탈리아인을 만드는것이 이탈리아의 시급한 문제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역감정이 상당히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스페인이나 독일, 미국의 경우에도 지역감정은 심각한 편입니다. 스페인의 경우에는 카스티야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 독일의 경우에는 구 동독 지방과 서독지방이 갈등을 빚고 있으며, 미국 역시 메갈로폴리스로 대표되는 동부와 실리콘밸리로 유명해진 서부가 서로 잘났다고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도 지역감정은 상당히 심각한 편입니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영국에서 주최하는 경기는 웨일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만 참전해도 국제 경기라고 부릅니다. 실상 하나로 영국인들이 모이는때에는 월드컵과 올림픽, 그리고 전쟁때만이라는 농담이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서로를 과거 휘그모어즈나 토리즈라고 부르면서 깠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네요. 따라서 우리나라만 지역감정이 심각한건 아닙니다.
본론으로 넘어가서, 지역감정의 태생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전라도인이 남방계가 많아서 따돌림을 당할수밖에 없다는 개드립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기원설, 조선시대 기원설, 삼국시대 기원설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위의 설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선사시대에 전라도인만 남방계가 많아서 따돌림당할수밖에 없다는 주장의 경우에는 함경도 역시 남방계 인구가 많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사람이 정착한지는 벌써 수천년이 넘게 지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어디에 정착한 사람이 다른곳으로 건너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전라도에 김해김씨가 많거나 경주김씨가 많다는것으로 증명됩니다.
삼국시대부터 기원했다는 점은 본문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그 시절에는 전라도 일부가 가야로 편입되었고, 당시의 경우에는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희미했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이 있긴 했지만 이 역시 민족 개념에서가 아닌 단순한 재부흥운동이라고 보는게 옳을것이고, 게다가 백제의 중심은 위례성을 근거로 한 한강유역과 공주등지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대인데, 이 충청도 일대와 경상도 일대의 경우에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것으로 보아서 실질적으로 이 설 역시 현실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도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차현 이남의 인재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실제로 지켜졌는지도 의문인데다가 고려의 1등 개국공신이었던 장절 신숭겸이 전라도 곡성 1 출신이었으며 장화왕후 오씨 역시 전라도 곡성인이었고, 전라도 전주가 본관이었던 유방헌 2은 4대 광종부터 8대 헌종까지 보필했던 신하였던 점, 그리고 후일 여요전쟁때 몽진(임금이 피난하는 곳)지를 전라도 나주로 정한것 역시 전라도에 대한 차별이 설득력이 낮다는 근거로 적용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거기다가 애시당초 전라도라는 행정구역은 고려 중기에 들어서야 겨우 정립된 행정구역으로서 실질적으로 보자면 이 지역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던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훈요10조에 나와있는 차령 이남의 인재들은 등용하지 말라라는 말은 후백제 잔존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집어넣은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뮈라(http://blog.naver.com/jangsp11)님의 의견에 따르자면 약간 다른 해석이 나올수도 있는데, 훈요 10조의 원문을 보자면 차령 이남과 공주강 외(外)라는 구절이 나와있는데, 뮈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 공주강 외(外)라는 구절을 공주강 위라고 생각하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것입니다. 이 지역은 약간 의미가 깊은곳인데, 바로 환선길과 이흔암의 모반사건과 청주지역의 반란이 일어난곳이라는겁니다. 3
거기다가 애시당초 전라도라는 행정구역은 고려 중기에 들어서야 겨우 정립된 행정구역으로서 실질적으로 보자면 이 지역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던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훈요10조에 나와있는 차령 이남의 인재들은 등용하지 말라라는 말은 후백제 잔존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집어넣은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뮈라(http://blog.naver.com/jangsp11)님의 의견에 따르자면 약간 다른 해석이 나올수도 있는데, 훈요 10조의 원문을 보자면 차령 이남과 공주강 외(外)라는 구절이 나와있는데, 뮈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 공주강 외(外)라는 구절을 공주강 위라고 생각하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것입니다. 이 지역은 약간 의미가 깊은곳인데, 바로 환선길과 이흔암의 모반사건과 청주지역의 반란이 일어난곳이라는겁니다. 3
또다른 해석에 따르자면 공주강 外라는 말은 공주강 上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범위는 전라도가 아닌 홍성, 보령, 부여, 공주, 연기, 청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붉은색은 차령산맥, 파란색은 금(공주)강
이 말은 곧 이 훈요10조에서 차령 이남과 공주강 외라는 구절이 공주강 위(上), 즉 홍성,보령,부여,공주,연기,청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며, 이는 실지로 전라도가 고려시대부터 차별받았다는 말은 실지로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라는 반박이 확실하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이, 조선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라는것에서부터 땡입니다. 4 애시당초 전라도의 중심지는 전주였으며, 조선조 당시에는 제 2의 수도로 불릴만큼 번성한 지역이 전주인데다가, 국가적으로도 거대한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상당한 대접을 해줬습니다. 사람들의 통념처럼 안동만이 양반문화의 중심이라 생각되는것은 편견에 따른것이며, 실지로도 전라도 자체가 농업이 중심이던 조선조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라도가 반역도로 찍혔다고 하시는 분들께는, 조선조에 반역도로 찍히지 않은 도는 경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애시당초 그 도에서 반역을 하면 반역도로 당연히 찍히는데, 전라도 역시 반역자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죠. 이러한것과 상관없이 전라도던 경상도던 어느 도던 양반은 제대로 나왔습니다. 실지적으로 보자면 고려조 조선조의 사람차별은 서북도지역이 메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지역감정을 일으킨 주범은 누구일까요? 바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정치하시는분들의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몇몇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퍼트렸다라는 소리는 잘못된 말이며, 실제로는 60년대부터 지역감정은 싹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박정희의 경우에는 오히려 영남보다 전남이 지지가 더 높았고, 이는 박정희의 공화당 역시 마찬가지로 전남지역에서의 표가 높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전라도에서 왜 박정희 지지율이 높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던 전라도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2배 표차로 이겼습니다만, 이후 60년대 후반의 전남출신 의원들의 지역불균형 이론과 71년대에 경남지역에 뿌려진 찌라시가 정치권에서의 지역감정의 시초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보자면 지역감정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모 블로그에서 인용해온 인용문입니다.
서울로 유입된 지역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호남과 충청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호남권과 충청권의 인구는 주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자나 일용직 혹은 비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저소득층의 출신지역별 분포에 대한 서울시의 조사를 보면 호남이 28.3%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충청이 17.3%, 서울이 14.2%, 뒤이어 영남은 12.5%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김만흠 1991 72). 1980년 기준으로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의 인구비가 11.7 : 16.2 : 30.5인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충청권과 호남권이 인구비중을 넘는 하층이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영남권의 서울로의 하층이동은 인구비중을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영남의 경우 농촌퇴출인구의 대부분은 영남지역의 산업 도시에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출신의 상당부분은 대학진학, 관료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의 이주였기 때문이다.당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부문 종사자, 그 밖의 다수의 실업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이 출신지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 출신이 다수를 점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고용자이나 피수혜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도시에서의 정착과 고용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비호남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피고용자와의 갈등에서 고용주가 그 원인을 호남의 지역성으로 치환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초기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두 번째 측면보다 첫 번째 측면이 보다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하층계급들 사이에 정착과 고용을 둘러 싼 생존경쟁이 훨씬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 본 김진국(1984)의 조사에서 나타나듯 호남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은 하층계급의 최다수를 차지하는 호남출신과 규모면에서 그 뒤를 잇는 충청 출신 이주민, 그리고 서울의 토박이 하층민 사이의 경쟁적 관계에서 기인하는 바 컸다고 하겠다. 5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이, 조선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라는것에서부터 땡입니다. 4 애시당초 전라도의 중심지는 전주였으며, 조선조 당시에는 제 2의 수도로 불릴만큼 번성한 지역이 전주인데다가, 국가적으로도 거대한 평야를 가지고 있어서 상당한 대접을 해줬습니다. 사람들의 통념처럼 안동만이 양반문화의 중심이라 생각되는것은 편견에 따른것이며, 실지로도 전라도 자체가 농업이 중심이던 조선조 당시에는 상당히 부유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라도가 반역도로 찍혔다고 하시는 분들께는, 조선조에 반역도로 찍히지 않은 도는 경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애시당초 그 도에서 반역을 하면 반역도로 당연히 찍히는데, 전라도 역시 반역자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죠. 이러한것과 상관없이 전라도던 경상도던 어느 도던 양반은 제대로 나왔습니다. 실지적으로 보자면 고려조 조선조의 사람차별은 서북도지역이 메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지역감정을 일으킨 주범은 누구일까요? 바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정치하시는분들의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몇몇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퍼트렸다라는 소리는 잘못된 말이며, 실제로는 60년대부터 지역감정은 싹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박정희의 경우에는 오히려 영남보다 전남이 지지가 더 높았고, 이는 박정희의 공화당 역시 마찬가지로 전남지역에서의 표가 높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전라도에서 왜 박정희 지지율이 높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던 전라도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2배 표차로 이겼습니다만, 이후 60년대 후반의 전남출신 의원들의 지역불균형 이론과 71년대에 경남지역에 뿌려진 찌라시가 정치권에서의 지역감정의 시초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보자면 지역감정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모 블로그에서 인용해온 인용문입니다.
인용문 시작 ---
서울로 유입된 지역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호남과 충청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호남권과 충청권의 인구는 주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자나 일용직 혹은 비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저소득층의 출신지역별 분포에 대한 서울시의 조사를 보면 호남이 28.3%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충청이 17.3%, 서울이 14.2%, 뒤이어 영남은 12.5%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김만흠 1991 72). 1980년 기준으로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의 인구비가 11.7 : 16.2 : 30.5인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충청권과 호남권이 인구비중을 넘는 하층이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영남권의 서울로의 하층이동은 인구비중을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영남의 경우 농촌퇴출인구의 대부분은 영남지역의 산업 도시에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출신의 상당부분은 대학진학, 관료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의 이주였기 때문이다.당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부문 종사자, 그 밖의 다수의 실업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이 출신지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 출신이 다수를 점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고용자이나 피수혜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도시에서의 정착과 고용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비호남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피고용자와의 갈등에서 고용주가 그 원인을 호남의 지역성으로 치환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초기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두 번째 측면보다 첫 번째 측면이 보다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하층계급들 사이에 정착과 고용을 둘러 싼 생존경쟁이 훨씬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 본 김진국(1984)의 조사에서 나타나듯 호남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은 하층계급의 최다수를 차지하는 호남출신과 규모면에서 그 뒤를 잇는 충청 출신 이주민, 그리고 서울의 토박이 하층민 사이의 경쟁적 관계에서 기인하는 바 컸다고 하겠다. 5
인용문 끝 ---
다음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실지적으로 보자면 타 지역의 호남에 대한 비호감은 이때부터 시작이 된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호남출신의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몰락과 그에 따른 농업중심의 전라도에서 살던 전남민의 다수 이주, 그리고 이에 따른 서울 토박이들의 전라도에 관한 미움과 이를 고용주가 이용하는등의 악순환이 시작되면서 타지역민들의 전라도 혐오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지역감정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된건 김대중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실 김대중의 등장이란 박정희 정부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호남출신이라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에 불고 있었던 새로운 바람이 김대중 후보의 등장과 함께 겹쳤다는 점입니다. 당시 산업화의 비용을 모조리 감수한 세대의 저항이 나타나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는 69년 3선 개헌에 대해 부정적인 재야의 탄생도, 또한 반(反)독재의 슬로건을 내놓고 학생들이 사회에 참여하던 시대도,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한 사건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김대중 후보는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제도와 기구, 이 시기 산업화가 낳은 불균등한 분배구조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중앙정보국의 수사제도를 법무부로 이관하고, 긴장상태인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4대 국보장안을 탄생시키며,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는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김대중은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여주었고, 이는 박정희 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는 박정희를 위시한 공화당이 지역감정을 부채질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공화당에서는 호남에 대해서 경상도인들이 반감을 갖게 부추기게 되죠. 김대중이라는 후보가 전라도인이라는 사실을 부추기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71년에 일이 터지고 맙니다. 바로 71년 찌라시(전단지) 사건이지요.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대략 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후보는 엄창록이라는 사람을 당으로 포섭했고, 엄창록은 여기서 '이기려면 지역주의를 자극해라'라는 말을 했지요. 그리고 선거를 앞둔 4월 27일, 영남에는 대규모의 찌라시가 뿌려집니다. 내용은 "전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라는 내용이었고, 결국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6 물론 이 작전은 경남에서만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부산에서는 오히려 역풍이 불어서 김대중 후보가 백분위로 44퍼센트나 표를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아래 표는 백분율을 기준으로 퍼센트로 각 지역에서의 득표율을 나타낸것입니다.
이후 지역감정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된건 김대중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실 김대중의 등장이란 박정희 정부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호남출신이라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에 불고 있었던 새로운 바람이 김대중 후보의 등장과 함께 겹쳤다는 점입니다. 당시 산업화의 비용을 모조리 감수한 세대의 저항이 나타나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는 69년 3선 개헌에 대해 부정적인 재야의 탄생도, 또한 반(反)독재의 슬로건을 내놓고 학생들이 사회에 참여하던 시대도,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한 사건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김대중 후보는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제도와 기구, 이 시기 산업화가 낳은 불균등한 분배구조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중앙정보국의 수사제도를 법무부로 이관하고, 긴장상태인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4대 국보장안을 탄생시키며,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는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김대중은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여주었고, 이는 박정희 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는 박정희를 위시한 공화당이 지역감정을 부채질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공화당에서는 호남에 대해서 경상도인들이 반감을 갖게 부추기게 되죠. 김대중이라는 후보가 전라도인이라는 사실을 부추기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71년에 일이 터지고 맙니다. 바로 71년 찌라시(전단지) 사건이지요.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대략 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후보는 엄창록이라는 사람을 당으로 포섭했고, 엄창록은 여기서 '이기려면 지역주의를 자극해라'라는 말을 했지요. 그리고 선거를 앞둔 4월 27일, 영남에는 대규모의 찌라시가 뿌려집니다. 내용은 "전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라는 내용이었고, 결국 박정희가 김대중을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6 물론 이 작전은 경남에서만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부산에서는 오히려 역풍이 불어서 김대중 후보가 백분위로 44퍼센트나 표를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아래 표는 백분율을 기준으로 퍼센트로 각 지역에서의 득표율을 나타낸것입니다.
7 | 서울 |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부산 | 경북 | 경남 | 제주 | 전국 |
박정희 | 40 | 50 | 61 | 58 | 55 | 37 | 35 | 56 | 76 | 74 | 58 | 54 |
김대중 | 60 | 50 | 39 | 42 | 45 | 63 | 65 | 44 | 24 | 26 | 42 | 46 |
다음 표차를 볼때, 결국 처음 지역감정이 시작된것은 전라도 출신의 빈민과 서울 토박이 빈민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정치적으로서의 지역감정은 김대중이 아닌 박정희가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보자면 박정희의 여론조작으로 인하여 "똘똘 뭉친 전라도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으며, 결국 이는 '영남 사람 치고 박정희 안찍으면 미친놈', '김대중은 호남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죠.
다음은 박정희가 특별히 경상도만을 좋아하고 다른 이유 없이 경남과 수도권에만 공업지대를 만들었다는 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부추긴것과 겹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보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조건 박정희가 영남지방에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영남지방에만 공업단지를 세운것이 아닙니다. 아래의 지도를 봅시다.
이 지도를 보면 대충 감이 잡히시는 분들도 꽤 계실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남권이 호남권보다 대일/대미 수출입에 적당했고, 게다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수도권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부산항을 통해서 수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구가 모이게 되었고, 게다가 수출을 하려면 당연히 항구와 가까이 있으면 운송비를 절약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기업들은 영남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서 영남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전라도는 오히려 중국에 가까운 지역이었는데, 개발이 시작되던 당시에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공과 적대적인 관계였고, 게다가 복잡한 섬들과 뻘밭이 많아서 전라도에 수출항을 세우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특성때문에 전라도에 대한 투자는 경상도에 비해서 부족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리적 특성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게 된 현대에도 발목을 잡습니다. 게다가 전라도에 있던 인구는 대부분 일자리가 있었던 수도권과 영남으로 빠져나가서 인구조차 부족하지요. 이는 결국 기업의 투자기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호남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음은 역사적으로 전라도가 진보 성향이 강하다는것에 관한것입니다. 글쎄요, 다시 한번 지도를 봅시다.
이 지도를 보면 대충 감이 잡히시는 분들도 꽤 계실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남권이 호남권보다 대일/대미 수출입에 적당했고, 게다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라는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수도권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부산항을 통해서 수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구가 모이게 되었고, 게다가 수출을 하려면 당연히 항구와 가까이 있으면 운송비를 절약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기업들은 영남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아서 영남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전라도는 오히려 중국에 가까운 지역이었는데, 개발이 시작되던 당시에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공과 적대적인 관계였고, 게다가 복잡한 섬들과 뻘밭이 많아서 전라도에 수출항을 세우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특성때문에 전라도에 대한 투자는 경상도에 비해서 부족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리적 특성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게 된 현대에도 발목을 잡습니다. 게다가 전라도에 있던 인구는 대부분 일자리가 있었던 수도권과 영남으로 빠져나가서 인구조차 부족하지요. 이는 결국 기업의 투자기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호남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음은 역사적으로 전라도가 진보 성향이 강하다는것에 관한것입니다. 글쎄요, 다시 한번 지도를 봅시다.
빗금쳐진 부분이 호남평야입니다. 실제보다 더 클수도, 작을수도 있습니다.
빨간색이 나주평야입니다.
보시다시피 본래 전라도는 현 전라북도에 위치한 거대한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와 같은 넓은 평야지대와 온난한 기후를 이용하여 벼농사로 먹고살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앞서 말했던것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주가 되었던 고대/중세에는 오히려 호남지역이 영남지역보다 더 부유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과거 조선조 시절에는 왕가의 본가가 전주에 있기 때문에 과거 고려의 평양과 같은 취급, 그러니까 제 2의 수도로 불리면서 전성기를 누렸던곳이 바로 전주입니다. 북쪽에 평양이 있다면, 남쪽에는 전주가 있다고 할 정도.거기다가 김정일도 전주김씨. 역시 왕가의 지역인가이때문에 전라도의 경우에는 지금과는 달리 주민들의 부가 상당했으며, 당연하게도 지금과는 달리 보수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반면 영남지역의 경우에는 산지 지역이 많고 게다가 평야도 얼마 없기때문에 농사를 짓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경상도 지역이 지금에 비해서 많이 가난했음을 보여주는것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경우에는 지금과 달리 진보적인 색채가 많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역전된것은 산업화 이후로서 영남과 호남의 경제력차가 역전되기 시작한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개의 향·소·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중 부곡은 217개가 경상도에 있었던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신라 자체가 부곡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으나 고려시대에 이쪽의 사람들을 차별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또 하나, 조선 후기 들어서 이인좌의 난 이후로 경상도 출신이었던 남인들은 조정으로부터 심각한 차별을 받는데, 사실 이인좌 자체가 청주인이라는것 외에도 그가 난을 일으킨 지역이 충청도 청주였다는 점, `영남의 여러 현들은 청주에서 비롯된 반란에 호응한 동조지역일 뿐이었다는 점등을 미루어볼때 실질적으로 반역도로 경상도만 찍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는 경상도(남인 동네)에 대한 조선의 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거기다가 과거 부산과 마산도 사실 진보적 성격으로는 전라도에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진보적인 성격이 전국에서 가장 강했던 지역입니다. 과거 4.19의 시발점은 마산에서 마산항쟁으로서 시작되었고, 이승만 퇴진 운동이 제일 먼저 터진곳도 바로 영남지역입니다. 이외에도 갖은 시위 역시 부산과 마산등지의 영남에서 먼저 벌어졌으니 영남 역시 진보적인 행태를 많이 보였다고 볼 수 있겠죠. 오히려 산업화 이전에는 영남지역이 훨씬 더 진보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대구매일신문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신문이었다고 하며, 이승만정권 당시 부산, 마산등지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전라도인이 기아, 해태, 삼양라면등지의 전라도 기업을 무조건적으로 애용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 자료는 구하지 못해서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건 이 썰을 푸는 사람들이 확실히 잘못알고 있다는것입니다. 기업의 태생지부터가 틀렸습니다.
먼저 기아의 경우에는 절대 전라도 기업이 아닙니다. 많은분들이 그것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시지만 실지로 보자면 기아는 충청도 출신의 기업으로서 전라도출신 자동차회사는 기아자동차의 자회사인 아시아자동차로서 두 회사는 태생은 완전히 다른 기업입니다. 게다가 삼양라면의 경우에는 본래 서울 도봉구에 공장을 세운것으로서 본래는 서울기업이었으나 현재 강원도 원주에 공장이 위치해있습니다. 해태 역시 전라도 출신의 기업이 아닙니다만 야구덕분에 어쩌다보니 전라도 기업으로 인식되게 되었지요.
게다가 전라도에서 과거 해태제과의 독점은 야구의 영향입니다. 당시 야구 열풍이 불면서 각각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팀이 창설이 되는데 이것이 어찌어찌 되다보니 야구가 지역싸움이 되어 롯데자이언츠로 대표되는 경상도는 롯데과자만을,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로 대표되는 전라도는 해태과자만을 먹게 된것이지요. 애시당초 야구열에 의해서 그런것을 전라도인의 상징으로 보자면 곤란합니다. 실제적으로 보자면 전라도를 대표하는 기업은 해태와 금호라고 볼 수 있는데, 해태는 그 근원지가 전라도가 아니며 실제로 보자면 금호고속이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오류는 바로 '지역성'이라는것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점입니다. 지역감정의 중심적인점은 바로 지역성으로서 전라도인은 지역적으로 원래 강력범죄자가 많고(이 역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뒤통수를 잘치니 전라도인은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이론인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전라도 사람들중 김해김씨나 경주쪽에 본관을 둔 사람들이 많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실제적으로는 지역성이 있다고 해도 이미 많은 도 출신의 지역성이 섞어져 있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 이놈을 도데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실 지역감정이라는게 결코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겁니다. 이는 선진국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지역감정이 너무 심하면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되는건 이미 당연한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은 국가의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와 있습니다.
본래 지역감정이란 원래부터 이탈리아나 영국처럼 갈등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작았던 갈등이 정치공작과 오해에 의해서 커진 케이스입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 오해를 없에고 지역감정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반면 영남지역의 경우에는 산지 지역이 많고 게다가 평야도 얼마 없기때문에 농사를 짓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경상도 지역이 지금에 비해서 많이 가난했음을 보여주는것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경우에는 지금과 달리 진보적인 색채가 많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역전된것은 산업화 이후로서 영남과 호남의 경제력차가 역전되기 시작한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개의 향·소·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중 부곡은 217개가 경상도에 있었던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신라 자체가 부곡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으나 고려시대에 이쪽의 사람들을 차별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또 하나, 조선 후기 들어서 이인좌의 난 이후로 경상도 출신이었던 남인들은 조정으로부터 심각한 차별을 받는데, 사실 이인좌 자체가 청주인이라는것 외에도 그가 난을 일으킨 지역이 충청도 청주였다는 점, `영남의 여러 현들은 청주에서 비롯된 반란에 호응한 동조지역일 뿐이었다는 점등을 미루어볼때 실질적으로 반역도로 경상도만 찍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는 경상도(남인 동네)에 대한 조선의 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거기다가 과거 부산과 마산도 사실 진보적 성격으로는 전라도에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진보적인 성격이 전국에서 가장 강했던 지역입니다. 과거 4.19의 시발점은 마산에서 마산항쟁으로서 시작되었고, 이승만 퇴진 운동이 제일 먼저 터진곳도 바로 영남지역입니다. 이외에도 갖은 시위 역시 부산과 마산등지의 영남에서 먼저 벌어졌으니 영남 역시 진보적인 행태를 많이 보였다고 볼 수 있겠죠. 오히려 산업화 이전에는 영남지역이 훨씬 더 진보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대구매일신문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신문이었다고 하며, 이승만정권 당시 부산, 마산등지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전라도인이 기아, 해태, 삼양라면등지의 전라도 기업을 무조건적으로 애용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 자료는 구하지 못해서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건 이 썰을 푸는 사람들이 확실히 잘못알고 있다는것입니다. 기업의 태생지부터가 틀렸습니다.
먼저 기아의 경우에는 절대 전라도 기업이 아닙니다. 많은분들이 그것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시지만 실지로 보자면 기아는 충청도 출신의 기업으로서 전라도출신 자동차회사는 기아자동차의 자회사인 아시아자동차로서 두 회사는 태생은 완전히 다른 기업입니다. 게다가 삼양라면의 경우에는 본래 서울 도봉구에 공장을 세운것으로서 본래는 서울기업이었으나 현재 강원도 원주에 공장이 위치해있습니다. 해태 역시 전라도 출신의 기업이 아닙니다만 야구덕분에 어쩌다보니 전라도 기업으로 인식되게 되었지요.
게다가 전라도에서 과거 해태제과의 독점은 야구의 영향입니다. 당시 야구 열풍이 불면서 각각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팀이 창설이 되는데 이것이 어찌어찌 되다보니 야구가 지역싸움이 되어 롯데자이언츠로 대표되는 경상도는 롯데과자만을,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로 대표되는 전라도는 해태과자만을 먹게 된것이지요. 애시당초 야구열에 의해서 그런것을 전라도인의 상징으로 보자면 곤란합니다. 실제적으로 보자면 전라도를 대표하는 기업은 해태와 금호라고 볼 수 있는데, 해태는 그 근원지가 전라도가 아니며 실제로 보자면 금호고속이 전라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오류는 바로 '지역성'이라는것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점입니다. 지역감정의 중심적인점은 바로 지역성으로서 전라도인은 지역적으로 원래 강력범죄자가 많고(이 역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뒤통수를 잘치니 전라도인은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이론인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전라도 사람들중 김해김씨나 경주쪽에 본관을 둔 사람들이 많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실제적으로는 지역성이 있다고 해도 이미 많은 도 출신의 지역성이 섞어져 있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 이놈을 도데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실 지역감정이라는게 결코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겁니다. 이는 선진국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지역감정이 너무 심하면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되는건 이미 당연한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은 국가의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와 있습니다.
본래 지역감정이란 원래부터 이탈리아나 영국처럼 갈등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작았던 갈등이 정치공작과 오해에 의해서 커진 케이스입니다. 그렇다면 지역감정, 오해를 없에고 지역감정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 그러나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자세한것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0364] 참조 [본문으로]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22225] 참조 [본문으로]
- 뮈라님 블로그 - 역사로 보는 전라도 (1) - 훈요 10조 [http://blog.naver.com/jangsp11/100145597379] 참조 [본문으로]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54723] 본관 전주(全州)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본문으로]
- [출처] 정치의 발견 - 1장 한국 지역주의의 기원과 구조 [http://blog.naver.com/parsh0305/70045997752] |작성자 parsh0305 [본문으로]
- 사건의 자세한 개요는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5] [지역주의의 시작과 끝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며 지역감정 유포 참조 [본문으로]
- 자료 출처 : [http://blog.naver.com/parsh0305/70045997752] 정치의 발견 - 1장 한국 지역주의의 기원과 구조 |작성자 parsh03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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